트랜스아트의 대표작 '더 게이츠'는 오거스트 로댕의 미완 걸작인 [지옥의 문]을 재해석해 ‘고통의 끝’ 이자 ‘절대적 초월’을 의미하는 [열반의 문]으로 재정립한 작품.

 

작가는 "신의 형벌인 동시에 끝없는 고통의 시작을 상징하는 지옥의 문"과 불교철학에서 "모든 고통의 끝을 의미하는 열반"을 재해석해 동서양 종교철학의 정수를 조화롭게 통합하며 지옥의 문인 동시에 천국의 문일수도 있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가로 놓인 문을 "자신을 비추는 진리의 거울"로 표현해 지옥과 천국의 양면성과 진리의 본질, 자유의지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THE GATES

 

Outside Exhibition Display Graphic simulation

 

더 게이츠 오리지널 시리즈

 

대표작 오리지널 게이츠 1호 작품

[열반의 문]

 

 

 

* 오리지널 시리즈는 거울을 사용한 작품 시리즈로 완성된 작품들은 작품은 강화도, 서울, 대구 팝업 모바일갤러리에 로테이션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The Gates Ⅰ [재해석된 지옥의 문: 나르바나의 입구]

 

 

시각견성의 시그니처 작품인 [더 게이츠]어거스트 로댕의 미완 조각 걸작인 '지옥의 문'을 재해석해 천국(나르바나:열반)의 입구로 완공한 작품입니다.

 

'지옥의 문'은 끝없는 고통을 상징하지만 문의 반대편에서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며, 그렇다면 그 문은 "지옥의 문인 동시에 천국의 문일수도 있는 게이트"의 양면성을 재해석하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의 형벌이자 끝없는 고통의 시작을 상징하는 지옥의 문"과 부처가 "모든 고통의 끝이라 정립한 초탈의 귀결, 나르바나의 의미"를 거울이란 매개체를 사용해 재정립해 "더 게이츠"란 작품을 통해 서양종교철학과 동양불교철학의 본질을 조화롭게 통합합니다.

 

트랜스 아티스트 신세원이 재정립한 [더 게이츠]지옥의 문인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진리의 거울]이고 [열반의 입구]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이 경험한 지옥 같았던 현실과 죽음을 마주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깨달은 바를 작품에 투영해 지옥의 문이 가진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의미와 그 안에 내재된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세상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원망하거나 절망하고 포기하는 대신 불가피한 삶의 그러함을 자발적 순응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때 지옥 같은 현실로 향하는 문은 상처받은 에고를 다 내려놓은 자리에서도 빛나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만날 수 있는 게이츠가 된다고 말합니다.

 

상처받고 퇴색돼서 손상된 녹슨 거울로 이루어진 지옥의 면으로 자신을 비출지, 아니면 맑고 깨끗한 있는 그대로의 천국의 면으로 자신과 세상을 비출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신의 선물이고 은총이며 그 어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자유의지의 실체라는 것을 [더 게이츠]를 통해 표현합니다.

 

더불어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이자 의식의 차원이며, 더 게이츠를 통해 에고의 어둠을 비출지 자신의 불변한 본성을 비출지, 더 게이츠를 열고 지옥을 향할지 나르바나에서 현존할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상태에 달려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 [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기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소개하려는 트랜스아트는 견성[깨달음과 깨어남]의 과정을 통해 나오게 되었으므로 실질적인 [시각견성]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더 게이트: 아버지의 이름으로]란 작품이 탄생한 계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명확히 해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견성]은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정신적 환골탈태나 초월적 대오각성 또는 기적적인 초탈이 아닙니다.

 

제가 의미하는 [견성][본성의 발견]으로 일상의 마음과 고정된 의식의 작동방식으로부터 벗어난 본성의 단순하고 명료한 의식상태이며 지적 도약의 시대에 모두가 맞이하게 될 의식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내면의 변화인 동시에 평생 동안 나라고 믿어온 에고의 의식작용, 두뇌와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고정된 [멘탈시냅스-자아의식의 두뇌정신회로도]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시작일 뿐입니다.

 

 

한얼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한얼그룹의 창업자이자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통일한국당 총재였던 정치가의 아들, 자발적 의식 진화와 자아 해방을 추구하는 한얼교의 초월철학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당시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신흥종교 창시자의 아들로 저는 제가 이 세상에 초대받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매우 어린 유아시절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성향이 강했던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저는 유일신을 거역한 어둠의 아들이었으니까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문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저 자신과 세상 모든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먹먹하고 슬프고 어두운 벽을 알게 되게 된 후로는 그저 혼자서 몰래 감당하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은 저 혼자로도 충분했으니까요. 한얼교 교주의 아들이란 선입견은 저에게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의 굴레이자 마음의 감옥이었고 유아 시절부터 저는 그렇게 혼자서 모두를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주위를 둘러봐도 항상 눈에 보이던 건 놓여있던 종이와 연필뿐.

 

그저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그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미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무렵부터 저는 그림에 광적으로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적으로 숙련된 미술 기량을 바탕으로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기적처럼 대상을 수상한 후 특전으로 미국 유학을 시작했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울과 동경에서 두 차례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도쿄 개인전에서 초인간주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미술을 소개했지만 좌절과 방황, 우여곡절을 거쳐 대학은 영국 옥스퍼드에서 정치 경제 철학을 전공하며 학자로서의 꿈을 키웠습니다. 제 운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같은 착각에 철없이 기뻤던 얼마 안되는 나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작고 후 저는 제 목표와 꿈을 포기하고 사태를 수습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가 평생을 다해 도망치려 했던 바로 그 운명적 위기를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한 종교를 창시하고 기업을 창업하고 정당을 창당한 절대적 카리스마의 리더가 사라지자 조직은 충격 받고 와해되기 시작했고 IMF국제금융위기를 직격탄으로 국가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저는 선친의 유업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 방법도 모르는 채 마치 발가벗겨진 것 마냥 법적 도의적 책임과 감당 불가능한 부채와 채무를 책임지고 리더를 잃은 단체의 절망과 패닉, 주위의 집단 히스테리와 광기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협박, 모함과 그로 인한 절망들, 끝없이 반복되는 위기와 고난, 하루 하루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격변, 좌절과 공황 속에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한계점을 갱신해가던 중 저는 최종 임계치를 넘어선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고통과 부조리, 억울함과 비통함 앞에서 어디 감히 제가 명함을 내밀 수 조차 있겠습니까만은, 가장 신뢰했던 인물들로부터 겪은 배신과 충격, 당시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저로 하여금 훗날 사태를 수습하고 조기 은퇴와 함께 미술 이외의 활동은 완전히 중단하고 오로지 미술가로만 남을 것임을 확고하게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은둔하며 작가명으로만 활동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없어져야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던 사람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가 떠나거나 사라지기를 종용했고 어쩌면 그것만이 답일 것도 같았습니다. 그때는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는 존재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더 많은 갈등과 대립, 고통의 이유로 사용되는 식물인간 같았고,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저를 빌미로 수 없이 많은 갈등과 거짓된 문제를 만들어 내는 고통의 이유가 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삶의 모든 순간 필사적으로 도망쳐 보려 했던 숙명의 삶의 굴레, 내 심연의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던 상상조차 못해본 모든 예측불허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으며 저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그 어떤 길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에는 저에게 남겨진 최후의 선택이자 제 마음에게는 유일한 해답이었던 선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선 저는 제 결정에 대해 마지막 용서를 구하기 위해 제 아버님의 사리를 친견하고 결코 용서받지 못할 사죄를 올린 후 지금 [빛의 견성]이 설치된 장소 뒷산의 절벽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완전히 발광한 업장에 빙의된 듯이 제 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에너지가 지배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면을 완전히 지배해 버린 어둠의 업장으로 인해 파괴적인 편도체의 충동과 극단적인 사고의 활동이 서로를 충전하고 자극하며 광기를 표출하였고 저는 정신나간 듯이 산을 타고 올라가 산 정상 절벽 앞 바위에 올라섰습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올라선 절벽 앞에서 저를 맞이한 날카로운 찬 공기와 말을 잃게 만들었던 고요한 절경이 아직도 선합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아니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제 의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으며 명료하고 맑았습니다. 제 감정과 몸은 극단적으로 흐느끼며 떨고 발경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제 의식은 마치 저의 정신이 아닌 듯이, 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뒤에서 쳐다보듯, 또는 하늘에서 내려다 보듯, 또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바라보듯 아무런 판단과 이해하려 하는 사고작용 없이 내 감정과 육체의 소용돌이를 맑고 밝게 인식하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그 찰나에 한편으로는 제 안의 광기의 실체를 직관으로 완벽히 알아차릴 수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광기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하는 것인지 확고히 인지했고 미친 마음이 나를 통해 행하려 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의식했습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던 고통의 실체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던, 끊이지 않는 이 모든 고통들이 종국에는 지나갈 것임을 명백히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고통과 고난들이 돌이킬 수 없는 불가피한 온연한 나의 몫임을 완전히 느끼고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만물이, 또는 모든 현상을 포함한 온 세상이, 그리고 삶의 그러함이, 제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완전히 받아들이기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사함이 제 얼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저는 저에게 벌어진 모든 것들, 고통과 슬픔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그러함이, 마치 나를 위해 완벽히 재단된 나의 오롯한 선택인 것처럼 무조건적인 순응으로 다 받아 들이기로 확고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제 에고, 사고하는 마음이 아닌, 맑고 고요한 의식 (초탈의식: 에고 의식작용을 ‘’월한 ‘’사고적인 마음 또는 본존의식, 내 ‘’래의 ‘’재상태로서의 의식) 이 제 삶의 전체적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체험을 통해 한얼교의 가르침에서 '견성’이라 표현하는 본성의 발견을 경험했습니다.

마치 순간에 내리친 벼락, 찰나의 낙뢰가 일시나마 어둠에 가려져 있던 절경과 감춰졌던 비경을 드러내는 것 마냥 저는 절대적 명료함으로 제 본성과 에고의 실체, 그 작용방식을 확고히 지각했습니다.

 

저는 저의 의식적 체험을 큰 깨달음이나 대오각성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단지 제 마음은 제가 아니며, 저는 제 마음으로부터 걸어나올 수 있다는 ‘’의 시작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사고하는 마음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초탈인지가 무엇인지 살짝 엿봤다고나 할까요? 마치 참된 자유가 뭔지를 처음 맛본 것처럼 말입니다.

 

제 경험은 매우 특별한 체험이었으나 제 자아의 의식구조 [평생을 걸쳐 설계되고 형성된 제 의식시냅스]는 단 한번의 맛보기로 환골탈태할 만큼 부실하지 않더군요. 때때로 제 각성력이 흐려지거나 인식력이 약해질 때 또는 의식수준이 낮아질 때 마다 마음에 빠지거나 에고의 작용을 각성하지 못하고 완전히 동화되고는 했습니다만 이전처럼 완전히 속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제가 [견성]이 무엇인지 체현한 이상 그것은 되돌려질 수 없는 확고한 이정표가 되었고 그것은 점진적 깨어남의 시작이었습니다.

 

자아의 멘탈시냅스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져 스스로의 한계에 갇히고 자아에 동화되어 작용할 때마다 저는 진심으로 반성하며 그러함을 인정하고 자아의 또 다른 함정인 죄의식에 빠지지 않고 저의 불완전함을 수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일생을 통해 자아에 의해 형성된 에고의 정신구조(마음의 멘탈시냅스)는 매우 견고하게 오랜 시간 동안 건조된 정신구조물이자 마음의 지도였고 제 참된 의지로 구조를 허물고 수정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지금 이순간도 여전히 저는 제 멘탈시냅스 (오래된 운명의 지도)를 제 본성의 의도에 맞게 다시 수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얼마나 걸릴지, 또는 언제 완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의식의 자아 통치력은 제 의지에 의해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근원적 정신력인 전념을 다해 집중과 반복을 통해 저는 제 의식의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바탕으로 끈기와 노력으로 집중, 연습과 반복을 통해 전념을 다하여 자아가 애초에 저를 차지한 똑 같은 방식을 역이용해 에고를 넘어설 수 있는 영적근력과 마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술들을 터득하고 개발했습니다.

저는 일단 동일화 된 후에는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멘탈시냅스의 구조와 불가항력적인 의식에너지의 함정, 마음의 불가피한 한계와 고통을 만들어 내는 작용방식, 고통의 뿌리와 에고가 형성된 근원적 이유와 원칙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제 의지를 통해 에고의식 상태와 사고하는 마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들, 인식과 의식의 차원을 전환하는 기술들을 터득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애초에 근원 의지를 의지할 수 있는 법, 내 자아가 아닌 내 본성의 의도를 의지하고 표현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시각견성]과 [더 게이츠]를 창작할 수 있었던 계기이자 이유이자 원인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본 것을 Trans-Art [시각견성]를 통해 보여드리기 시작하겠습니다.

 

 

The Gates

 

 

“로댕은 지옥의 문을 20년 동안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의 작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 세상 너머의 문으로 들어갔다.

 

지옥의 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압도적이고 웅장한 존재감을 느낀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다시 지옥의 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아닌 서울에서.

시시때때로 나는 플라토 갤러리로 가 지옥의 문을 묵상하며 의식 속으로 침잠하였다.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성찰하고 사색하는 것일까?

로댕이 지옥의 문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로댕의 마음에 비친 지옥의 문을 열면 뭐가 있을까?

지옥의 문에 깔린 고요함이 해답을 속삭일 때까지 나는 보고 묻고 느끼고 다시 봤다.

 

문의 목적은 열고 들어가 목적지로 도달하기 위한 것,

문의 완성은 열고 들어갈 곳을 발견하기 위함이 아닐까?

로뎅은 형상 너머의 문을 열고 자신의 형상을 떠나기 전까지 과연 자신의 목적지를 발견한 것일까?

 

지옥이란 신의 형벌이며 가장 큰 고난이다.

 

지옥의 문은 들어가기 전에는 끝없는 고통의 시작을 의미하는 문이다.

하지만, 그 문의 정 반대편에서는 고통의 끝을 상징하는 문일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 이지만

내 마음도 지옥과 죽음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삶이 지옥이었고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장 큰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지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는,

마치 어둠 속 낙뢰가 일순간이나마 숨겨진 비경을 드러내듯,

견성의 찰나를 엿보았다.

 

그때의 체험으로 깨달은 찰나의 진실은

지옥을 경험하던 에고의 마음 너머 근원에는

그 어떠한 삶의 상황 : 슬픔, 고통 그리고 지옥과 죽음마저 범접할 수 없는

불변하며 고요한 맑고 밝은 나의 참된 본성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내 에고에게는 가장 큰 형벌이었던,

지옥 같던 세상을 향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든 거짓된 것들을 두고 건너온 자리에도 변치 않고 남아있던 내 본성을 만날 수 있었다.

 

원망과 저주를 버리고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마치 나를 위해 완벽히 재단된 나의 오롯한 선택처럼 받아들였을 때,

신의 선물, 평화를 얻었다.

 

그것이 바로 내게는 천국의 입구.

 

신의 선물이란

우리가 알던 지옥, 에고에게는 가장 큰 고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불가피한 그러함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조건 없이 수용할 때,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

천국을 향한 문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신의 은총이 아닐까?

 

과연 로댕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지옥의 문을 완공할 수 있었을까?

 

로댕이 아무리 훌륭한 조각과 위대한 형상을 미완의 작품에 덧붙인다 하여도 한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지옥의 문은 로댕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일 거라는 사실이다.

  

The Gates [재해석된 지옥의 문: 완공된 천국의 입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지옥의 면은 상처받고 퇴색되어 손상된 녹슨 거울이

천국의 면은 맑고 깨끗이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비춘다.

  

어느 면에 서서 자신을 비출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

그것이 신의 은총이며

누구도 나 자신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자유의지의 실체이다.

천국은 장소나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내면의 상태이며

의식의 차원이다.

지옥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거스트 로뎅에 대한 오마쥬

트랜스아티스트

 

은 끝없는 고통을 상징하는 '지옥의 문'과 모든 고통의 끝을 의미하는 '열반의 문'을 [거울]이라는 매개체로 통합해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진리의 문"을 표현했으며 이미 제작되어 강화도와 대구에 특별 전시중인 오리지널 작품들 외에 제작중인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는 거울 대신 빛을 사용한 "Enlightenment 시리즈"다.
작가는 거울 대신 거대한 대리석 문 사이로 비추는 빛을 통해, 자신의 의식의 차원과 내면의 상태에 따라 그 빛은 의미(천국과 지옥, 열반과 고통, 진리의 빛과 화염의 불길)를 달리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비춘다는 보편적 진리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 빛의 참된 의미는 삶과 죽음, 시공을 초월한 영원불멸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다.

 

프로젝트 플랜 은 [디지털 게이트]로 게이트 내부는 첨단 스크린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거울의 기능 뿐 아니라 수많은 트랜스아트가 내부의 디지털 스크린에 표현될 수 있는 작품으로 디지털 게이트가 설치된 모든 곳을 하나로 연결하는 게이트가 된다. LED 또는 QLED 디지털 스크린이 게이츠 Ⅰ과 게이츠 Ⅱ의 거울과 빛의 표현을 극대화한다.

 

 는 모바일 게이트로 스마트 폰 디바이스를 사용하여 디지털 게이트의 다양한 트랜스아트 작품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